1939년 9월, 유럽은 이미 전쟁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고, 영국과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했다. 신문 1면은 매일 새로운 재앙을 예고했고, 뉴욕증권거래소의 트레이더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대공황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시점에 또 다른 전쟁이라니, 시장은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다는 듯 주가를 끌어내리고 있었다.
바로 이 순간, 당시 26세의 존 템플턴은 전혀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는 브로커였던 딕 플랫에게 전화를 걸어 이상한 주문을 넣었다. 뉴욕증권거래소와 아메리칸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종목 중 주가가 1달러 미만인 모든 종목을, 각각 100달러어치씩 사달라는 것이었다. 업종도, 재무제표도, 경영진의 이름도 묻지 않았다. 그저 ‘1달러 미만’이라는 조건 하나로 104개 종목을 사들였다. 그중 34개는 이미 파산 절차를 밟고 있는 회사들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이 돈을 자기 주머니에서 꺼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그는 모아둔 돈이 거의 없었다. 그는 옛 상사에게 1만 달러를 빌려 이 매수를 감행했다. 전쟁이 터진 날, 가진 돈도 없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휴지 조각 같은 주식들을, 그것도 빚을 내어 쓸어 담은 것이다. 상식적으로 보면 이보다 무모한 결정은 없어 보였다.
공포가 만드는 가격의 왜곡
템플턴이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만의 독특한 사고 습관이 있었다. 그는 시장이 어떤 소식에 반응할 때, 그 반응의 크기가 소식 자체의 실질적인 영향보다 언제나 과장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었다. 전쟁이 났다고 해서 미국 내 모든 상장 기업이 동시에 망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회사는 전쟁과 아무 관련도 없는 사업을 하고 있었고, 어떤 회사는 오히려 전시 수요로 이익을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투자자들의 심리는 그런 미세한 구분을 하지 않았다. 공포에 휩싸인 시장은 좋은 회사와 나쁜 회사를 가리지 않고 함께 팔아치웠다.
템플턴은 훗날 이 순간을 회고하며, 자신이 특별히 용감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산수를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1달러 미만으로 거래되는 회사 중 상당수가 설령 파산하더라도, 공장 설비나 재고, 부동산 같은 청산 가치만으로도 주가보다 더 큰 돈을 회수할 가능성이 있었다. 즉 최악의 시나리오에서도 손실이 제한적인 반면, 전쟁이 끝나고 경제가 정상화되면 다수의 종목에서 몇 배의 수익이 날 수 있는 비대칭적인 구조였다. 104개 종목 중 몇 개가 완전히 휴지 조각이 되어도, 나머지가 그 손실을 압도적으로 상쇄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개별 종목이 아니라 확률에 베팅하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템플턴이 이 104개 회사 중 어느 하나도 개별적으로 분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어떤 특정 기업의 미래를 확신해서 산 것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저평가된 자산군 전체’의 통계적 반등 가능성에 베팅했다. 이는 개별 기업의 펀더멘털을 파고드는 전통적인 가치투자와는 결이 다른 접근이었다. 오히려 확률과 분산의 힘을 믿는 태도에 가까웠다. 그는 시장 전체가 비이성적인 공포에 빠져 가격을 왜곡시켰을 때, 그 왜곡이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교정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믿음을 개별 종목 선별이 아니라 폭넓은 바스켓 매수로 실행에 옮겼다.
실제로 시간이 지나며 이 베팅은 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미국 경제는 군수 생산을 중심으로 다시 살아났고, 파산 직전이라 여겨졌던 회사들 중 상당수가 회생하거나 인수되었다. 4년 뒤 템플턴이 이 주식들을 정리했을 때, 그가 빌린 1만 달러는 4만 달러로 불어나 있었다. 100개가 넘는 종목 중 완전히 가치가 사라진 것은 단 4개뿐이었다.
비관론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템플턴은 이 경험을 계기로 평생 지켜온 원칙 하나를 체득했다. 그는 이를 “비관론이 최고조에 달한 지점”이라 불렀다. 모두가 최악을 이야기하고, 모두가 팔아야 한다고 느끼고, 뉴스가 더는 나빠질 수 없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자산 가격이 실제 가치와 가장 크게 괴리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모두가 낙관하며 앞다투어 사들일 때가 오히려 가장 위험한 시점이라고 보았다.
이런 사고방식은 이후에도 그의 투자 인생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2차 대전 이후에도, 일본 시장이 저평가되어 있던 시기에도, 여러 신흥국 시장의 위기 국면에서도 비슷한 패턴의 결정을 내렸다. 공통점은 언제나 대중의 공포가 극에 달한 순간, 남들이 시선을 돌리는 곳을 오히려 들여다보았다는 점이다.
1939년의 그 전화 한 통은 단순히 운이 좋았던 베팅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장이 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순간과 펀더멘털에 의해 움직이는 순간을 구분할 줄 아는 눈, 그리고 그 판단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배짱이 만나 만들어낸 결과였다. 전쟁의 포성이 울리던 그날, 뉴욕의 한 젊은 브로커는 남들이 도망치는 방향과 반대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