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뉴욕. 주식시장이 무너지던 그해, 어빙 칸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벤저민 그레이엄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대공황이 수많은 투자자들의 자산과 신념을 동시에 무너뜨리던 시기에, 한 청년은 오히려 이 붕괴 속에서 어떤 원칙이 무너지지 않았는지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훗날 어빙 칸은 그레이엄의 조교가 되었고, 그 유명한 저작 《증권분석》의 집필을 돕는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가치투자라는 개념 자체가 아직 이름조차 갖지 못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레이엄의 곁에서 어빙 칸이 배운 것은 특정한 종목을 고르는 요령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숫자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시장의 소음과 회사의 실체를 구분하는 습관이었다. 재무제표를 읽을 때 낙관도 비관도 배제하고, 오직 “이 회사가 망하더라도 남는 것이 있는가”를 먼저 묻는 방식. 이는 그레이엄이 강조한 안전마진 개념의 실전판이었고, 어빙 칸은 이 태도를 평생 동안 거의 수정하지 않고 유지했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투자 인생
어빙 칸의 이력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극적인 성공담의 부재다. 그는 피터 린치처럼 대중적인 스타 펀드매니저도 아니었고, 제시 리버모어처럼 시장을 뒤흔든 투기꾼도 아니었다. 그는 그레이엄-뉴먼 파트너십에서 일했고, 이후 자신의 투자회사인 칸 브라더스를 통해 조용히 자금을 운용했다.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지도 않았고, 화려한 언어로 투자 철학을 포장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가 지킨 것은 일관성이었다. 시장이 과열되어 있을 때 남들이 뭔가를 놓칠까 봐 조급해할 때도, 어빙 칸은 기업의 본질적 가치와 시장 가격 사이의 괴리를 계산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이는 지루해 보일 수 있는 작업이지만, 동시에 감정적 판단의 여지를 최소화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레이엄이 말한 “미스터 마켓”이라는 비유, 즉 시장은 매일 다른 기분으로 가격을 제시하는 변덕스러운 존재이며 투자자는 그 변덕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어빙 칸은 문자 그대로 실천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100세 넘어서까지 이어진 현역 생활
어빙 칸을 특별하게 만드는 지점은 그가 100세를 넘긴 이후에도 투자 업무를 계속했다는 사실이다. 공개된 자료를 보면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사무실에 나가 재무제표를 검토하고 투자 의사결정에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단순히 장수했다는 사실보다 더 흥미로운 지점을 시사한다. 그의 투자 방식이 애초에 단기적인 긴장과 스트레스에 의존하지 않는 구조였다는 점이다.
시장을 예측하려 들거나 하루하루의 가격 변동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방식이었다면,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 긴장을 유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신 그는 기업의 펀더멘털을 오랜 시간에 걸쳐 검토하고, 가격이 가치에 비해 충분히 낮아졌을 때만 움직이는 방식을 택했다. 이런 방식은 조급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자기편이라는 확신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접근이다.
조교에서 증인으로
어빙 칸이 남긴 것 중 하나는 가치투자라는 사상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어떻게 전달되었는지를 몸소 보여준 증인의 역할이다. 그는 그레이엄의 학생이자 조교였고, 동시에 워런 버핏을 포함한 훗날의 가치투자자들이 등장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기도 했다. 대공황 직후의 폐허 같은 시장에서 태어난 원칙이, 닷컴 버블과 금융위기를 거치면서도 크게 형태를 바꾸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던 데에는 어빙 칸처럼 그 원칙을 묵묵히 실천하며 다음 세대에 전달한 사람들의 존재가 있었다.
그가 남긴 인터뷰나 기록을 보면 화려한 수사는 찾기 어렵다. 대신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인내, 그리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는 손대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한 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시장은 몇 번이고 그 모습을 바꾸었지만, 어빙 칸이 그레이엄에게서 배운 질문, 즉 “이 가격이 이 회사의 실제 가치에 비해 합리적인가”라는 질문만큼은 처음 배운 그대로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