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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 클라먼, 현금을 든 채 기다리는 법

2026-09-15

1982년,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갓 졸업한 세스 클라먼은 바우포스트 그룹이라는 작은 투자회사를 만든다. 화려한 월가의 트레이딩 데스크가 아니라 보스턴이라는, 뉴욕과는 다소 거리를 둔 도시에서였다. 이 지리적 거리는 상징적이었다. 클라먼은 이후 40년 가까이 시장의 소음에서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떨어져 있는 것을 택한 사람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화려한 수익률 자랑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이었다. 1991년에 낸 Margin of Safety는 오래전에 절판되었고, 한동안 중고 시장에서 수백 달러에 거래된다는 이야기가 투자자들 사이에 전설처럼 돌았다. 왜 이 책이 그렇게까지 회자되었는가를 이해하려면, 그가 말한 ‘안전마진’이라는 개념이 벤저민 그레이엄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면서도 클라먼의 손을 거쳐 훨씬 더 현실적이고 방어적인 형태로 다듬어졌다는 점을 봐야 한다.

손실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대부분의 투자자는 “이 주식이 얼마나 오를 수 있는가”를 먼저 묻는다. 클라먼은 반대로 시작한다. “이게 얼마나 잘못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최악의 시나리오에서 나는 얼마를 잃는가.” 이 질문의 순서를 바꾸는 것이 그의 사고방식 전체를 규정한다. 안전마진이란 결국 내가 추정한 가치와 실제 지불하는 가격 사이의 간격이고, 그 간격이 클수록 내 판단이 틀렸을 때도 버틸 여지가 생긴다는 논리다.

이 태도는 그가 절대수익(absolute return)을 추구한다는 사실과 맞물린다. 벤치마크 대비 몇 퍼센트를 앞섰는지가 아니라, 원금을 지키면서 실질적인 돈을 벌었는지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지수를 이기는 것과 돈을 잃지 않는 것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게임이다. 지수 대비 성과를 좇는 매니저는 시장이 오를 때 현금을 들고 있으면 뒤처진다는 압박을 받는다. 클라먼에게는 그런 압박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했다.

현금은 게으름이 아니다

바우포스트가 특정 시기에 운용자산의 상당 부분을 현금이나 현금성 자산으로 들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매체와 투자자 서한을 통해 알려져 있다. 정확한 비중이나 시점은 시기마다 다르고 공개된 수치도 시점에 따라 편차가 있어 단정하기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살 것이 마땅치 않을 때 억지로 사지 않았다는 태도다.

많은 투자자에게 현금은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로 취급된다. 수수료를 받는 펀드매니저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돈을 맡겨놓고 현금으로 쌓아두면 고객에게 설명하기 곤란해진다. 그런데 클라먼은 현금을 콜옵션에 비유한 적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만기가 없고, 행사가격이 계속 낮아지는 옵션. 시장이 패닉에 빠져 자산 가격이 무너질 때, 현금을 들고 있던 사람만이 그 순간에 행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기다림 자체가 하나의 포지션이라는 발상이다.

위기가 기회로 바뀌는 순간

이런 태도가 실제로 힘을 발휘한 것으로 자주 언급되는 시기가 2008년 금융위기다. 시장 전체가 유동성 경색으로 자산을 헐값에 던지던 그때, 미리 현금을 쌓아두고 기다렸던 투자자들은 다른 이들이 강제로 팔아야만 하는 자산을 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클라먼과 바우포스트가 그 시기에 구체적으로 어떤 종목을, 얼마의 비중으로 매수했는지에 대한 세부 내역은 공개되어 있지 않다. 다만 위기 국면에서 유동성을 쥐고 있던 자가 유리한 협상력을 가진다는 원칙 자체는 그의 철학을 관통하는 핵심으로 널리 인용된다.

흥미로운 점은 클라먼이 이런 결정을 내릴 때 시장을 예측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언제 폭락이 올지 맞히려 하지 않았다. 대신 폭락이 왔을 때 행동할 수 있는 상태를 항상 유지하려 했다. 예측과 준비는 다르다. 예측이 틀리면 손실로 이어지지만, 준비는 틀려도 기회비용 정도의 대가만 치른다. 몇 년간 현금을 들고 아무 성과도 못 낸 것처럼 보이는 시간이, 위기의 순간에는 결정적인 자산이 되는 것이다.

대중 앞에 잘 나서지 않는 이유

클라먼은 언론 노출을 극도로 자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우포스트는 상장되어 있지 않고, 그의 인터뷰나 공개 발언도 드물다. 이는 단순한 은둔 취향이 아니라 그의 투자 철학과 일관된 태도로 보인다. 시장의 관심이 몰리는 곳, 유명세가 따라붙는 종목이나 전략에는 이미 안전마진이 깎여 나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그의 오랜 전제이기 때문이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 유동성이 부족하거나 상황이 복잡해서 분석하기 귀찮은 자산에서 기회를 찾는 태도와, 스스로도 스포트라이트를 피하는 태도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결국 클라먼이 남긴 것은 특정한 종목 선정 기법이라기보다, 시간을 대하는 방식이다. 시장이 무언가를 하라고 재촌할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 인내의 시간을 손실이 아니라 준비로 이해하는 관점. Margin of Safety가 절판된 책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는 아마 그 관점이 시대와 무관하게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