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 뉴욕의 한 젊은 펀드매니저가 갑자기 스위스 취리히로 사무실을 옮겼다. 월가의 화려한 네트워크와 정보의 중심에서 스스로 걸어 나온 셈이었다. 그의 이름은 가이 스페어(Guy Spier). 아쿠아마린 펀드(Aquamarine Fund)를 운용하던 그가 월가를 떠난 이유는 단순했다. 그곳에 계속 있으면 자신이 점점 다른 사람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페어는 옥스퍼드를 나와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마친, 누가 봐도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회고하길, 초년의 월가 생활은 그에게 그다지 좋은 기억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 격 저서 Education of a Value Investor에서 당시를 두고 경쟁과 비교, 남과의 서열 매기기에 지나치게 몰두했던 시기였다고 털어놓는다. 투자자로서의 판단력보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지위에 더 신경 쓰던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워런 버핏과의 우연한 만남, 그리고 자선 점심 경매
스페어의 삶에서 하나의 전환점은 워런 버핏을 실제로 만난 경험이었다. 그는 버핏과의 자선 점심 경매(Power Lunch, 글라이드 재단을 위한 기부 경매로 알려져 있다)에 낙찰돼 실제로 오마하에서 버핏과 식사를 함께한 사람 중 하나다. 이 자리에서 그가 얻은 것은 특별한 종목 정보나 투자 비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버핏이라는 사람이 지닌 태도, 즉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고 스스로 정한 내적 기준(inner scorecard)으로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한다.
스페어는 이 점심 자리 이후로 자신의 투자 환경을 근본적으로 다시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뉴욕 월가의 물리적, 사회적 환경 속에 있으면 아무리 의지가 강해도 남들과 비교하고 조급해지는 습성에서 자유롭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아예 물리적으로 그 환경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취리히로의 이주와 환경 설계
취리히로 옮긴 뒤 스페어는 자신의 업무 환경 자체를 가치투자에 유리하게 다시 짰다. 화면 여러 개를 띄워놓고 실시간 시세를 좇는 트레이딩 데스크 대신, 조용히 기업의 사업보고서를 읽고 오래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뉴스에 즉각 반응하지 않고, 좋은 기업을 발견하면 오래 보유하는 투자자가 되기를 원했고, 그러려면 매일 주가 등락에 자극받는 환경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태도는 스페어가 즐겨 언급하는 찰리 멍거의 영향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멍거를 개인적으로 만나 조언을 구했고, 자신이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고 어떤 습관을 들이는지가 투자 성과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라는 점을 배웠다고 말한다. 스페어는 이후 자신의 삶에서 ‘누구를 롤모델로 삼을 것인가’, ‘어떤 습관의 고리 속에 스스로를 두는가’를 투자 철학의 핵심 축으로 삼게 된다.
화려함보다 조용한 지속
아쿠아마린 펀드는 초기부터 화려한 수익률 경쟁이나 대규모 자금 유치를 목표로 하는 펀드는 아니었다. 스페어 스스로도 자신을 두고 버핏이나 멍거 같은 거장의 원칙을 실천하려 애쓰는 학생 같은 투자자라고 표현하곤 한다. 그는 자신이 완벽한 투자자가 아니며, 오히려 스스로의 심리적 약점과 환경적 유혹을 인정하고 그것을 다스리기 위해 끊임없이 구조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라는 점을 숨기지 않는다.
가이 스페어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특별한 재능이나 남들이 갖지 못한 정보로 성공을 거둔 인물이 아니다. 대신 그는 자신이 어떤 환경에 놓였을 때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그 환경을 스스로 바꿔나간 사람이다. 뉴욕에서 취리히로의 이주는 지리적 이동이라기보다, 자신을 어떤 투자자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선택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