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의약품 도매업체의 신뢰
맥케슨앤로빈스(McKesson & Robbins)는 19세기부터 이어져 온 미국의 의약품 도매·유통 기업이었다. 1926년 이 회사를 인수해 경영을 주도한 인물은 F. 도널드 코스터(F. Donald Coster)라는 이름을 쓰던 사업가였다. 그는 회사를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된 대형 도매업체로 키워냈고, 재무제표상 탄탄한 자산과 매출을 앞세워 은행권과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었다. 그러나 이 인물의 본명은 필립 무시카(Philip Musica)로, 과거 식품 사업과 관련해 사기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전력이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드러나지 않았다.
가공 자회사와 존재하지 않는 재고
맥케슨앤로빈스의 사업 구조에는 W. W. 스미스&리처드슨(W.W. Smith & Richardson Co.)이라는 캐나다 소재 원료의약품 매입 부문이 있었다. 회사 측 설명으로는 이 부문이 대량의 원료의약품 재고를 캐나다 창고에 보관하며 거래를 이어가는 구조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재고와 거래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무시카는 가짜 매입·매출 서류와 허위 송장을 만들어 회사 장부에 대규모 자산과 매출채권을 계상했고, 이를 근거로 은행 대출과 회사채 발행을 받아냈다. 전체 자산 중 상당 부분이 이런 방식으로 부풀려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감사인들은 재고와 매출채권의 실물을 직접 확인하지 않은 채 회사 측이 제공한 서류와 확인서에 의존해 감사를 마쳤다.
균열이 드러난 시점
1937년 말, 회사 재무 담당 임원 중 한 명이 캐나다 자회사의 실체와 거액의 현금 지출 경로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내부 조사가 시작되었다. 회사 측이 말하는 창고와 재고를 실제로 확인하려는 시도가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던 사업 부문의 실체가 없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이는 뱅크런이나 마진콜 같은 외부 충격이 아니라, 내부 인력의 문제 제기와 실물 확인 요구에서 비롯된 균열이었다.
붕괴 과정과 후폭풍
1938년 사건이 공개되면서 맥케슨앤로빈스 주가는 급락했고, 회사는 결국 파산 절차를 밟았다. 무시카는 체포 직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의 본명과 과거 전력이 언론을 통해 뒤늦게 알려졌다. 이 사건은 공인회계사(CPA) 감사 관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미국공인회계사협회(AICPA)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감사인이 재고 자산에 대해 실사(현물 확인)를 수행하고, 매출채권에 대해 거래 상대방에게 직접 조회(confirmation)를 하도록 하는 감사 기준을 정비했다. 즉 이전까지는 회사 측이 제시한 서류를 신뢰하는 것만으로 감사가 성립할 수 있었지만, 이 사건 이후로는 감사인이 독립적으로 자산의 실재성을 검증해야 한다는 원칙이 제도화됐다.
남은 교훈 — 점검 체크리스트
- 경영진의 이력 확인: 상장기업 최고경영자의 과거 이력이 지나치게 불투명하거나 검증이 어렵다면, 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위험 신호다.
- 자산의 실재성 검증 여부: 재고나 매출채권처럼 회계상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자산이 실물 확인이나 제3자 조회 없이 서류만으로 유지되고 있지는 않은지, 감사보고서의 감사 범위와 방법을 살펴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맥케슨앤로빈스 사건은 화려한 레버리지 베팅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자산을 서류만으로 오랫동안 감사와 시장 모두를 통과시켰다는 점에서 특이한 사례로 남아 있다. 감사 제도의 허점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보여준 초기 사례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