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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밀러, 15년의 기록과 그 이후

2026-09-08

1990년대 중반,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한 자산운용사에서 일하던 빌 밀러라는 펀드매니저가 있었다. 그가 운용하던 레그메이슨 밸류트러스트는 이름과 달리 전통적인 저PER, 저PBR 중심의 ‘가치투자’와는 거리가 있었다. 밀러는 철학을 전공한 인물이었고, 워런 버핏 식의 가치투자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아마존, 델, AOL 같은 당시 기준으로는 ‘성장주’이자 ‘고평가 논란주’로 분류되던 기업들을 포트폴리오에 담았다. 전통적인 가치투자자들의 눈에는 이단처럼 보이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 방식이 통했다. 밀러가 이끄는 밸류트러스트는 1991년부터 2005년까지 15년 연속으로 S&P500 지수를 능가하는 수익률을 기록했다. 이는 미국 뮤추얼펀드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연속 기록이었다. 매해 시장을 이긴다는 것 자체가 통계적으로 극히 드문 일인데,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단 한 해도 빠짐없이 지수를 상회했다는 사실은 월가 전체의 주목을 끌었다. 언론은 그를 ‘살아있는 전설’로 불렀고, 그의 매매 하나하나가 뉴스가 되었다.

왜 그의 방식이 특별했는가

밀러의 접근은 단순히 ‘싼 주식을 산다’는 전통적 가치투자 공식을 넘어섰다. 그는 한 기업의 내재가치를 현재의 장부가치나 이익이 아니라, 그 기업이 미래에 만들어낼 현금흐름과 사업 모델의 구조적 우위를 기준으로 판단하려 했다. 아마존에 대한 초기 투자가 대표적이다. 당시 아마존은 이익을 내지 못하는 온라인 서점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밀러는 그 기업이 구축하고 있는 유통 인프라와 고객 기반의 장기적 가치를 다르게 해석했다.

이런 태도는 벤저민 그레이엄 식의 정량적 안전마진과는 다른, 좀 더 정성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가치평가에 가까웠다. 밀러 본인도 자신을 ‘가치투자자’로 규정하면서도, 가치와 성장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시각 자체가 잘못됐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주식이 싸냐 비싸냐가 아니라, 시장이 매긴 가격과 자신이 계산한 내재가치 사이에 얼마나 큰 괴리가 있느냐였다.

기록이 깨진 이후

2005년을 끝으로 그 연속 기록은 마감됐고, 이후의 이야기는 이전과 사뭇 다르게 전개된다. 2007년부터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 국면에서 밸류트러스트는 큰 폭의 손실을 기록했다. 밀러가 금융위기 직전까지 베어스턴스, AIG, 프레디맥 같은 금융주들을 저평가됐다고 판단해 매수하거나 보유를 유지했던 결정이 뼈아픈 결과로 이어졌다. 그가 강점으로 여겼던 ‘시장이 과도하게 비관적일 때 사는’ 전략이, 그 비관이 근거 없는 공포가 아니라 실제 붕괴의 전조였던 국면에서는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15년간 시장을 이긴 펀드매니저가 단 몇 년 사이에 그동안 쌓은 초과수익 대부분을 반납했다는 사실은 투자 업계에 오래도록 회자되는 사례가 됐다. 그의 몰락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왔다. 어떤 이들은 장기간의 성공이 오히려 과신을 낳았고, 그 과신이 위기 국면에서의 리스크 관리 실패로 이어졌다고 봤다. 또 다른 이들은 그의 스타일 자체, 즉 시장의 비관을 역이용하는 전략이 애초에 꼬리위험에 취약한 구조였다고 지적했다.

기록이 남긴 질문

빌 밀러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지점은 단순히 ‘한때 잘나갔던 펀드매니저가 몰락했다’는 서사가 아니라는 데 있다. 15년 연속 시장을 이겼다는 기록 자체가, 그것이 순수한 실력이었는지 혹은 특정 시기의 시장 환경과 운이 겹친 결과였는지를 사후적으로 완벽히 가려낼 수 없다는 점을 그의 사례는 보여준다. 통계적으로 수천 명의 펀드매니저 중 누군가는 오랜 기간 우연히도 시장을 이길 수 있다는 반론도 있었고, 밀러의 투자 논리와 리서치 과정을 들여다보면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 어렵다는 반박도 있었다.

밀러 본인은 금융위기 이후에도 투자를 이어갔고, 이후 몇 년간 회복의 시기를 거쳤다. 그의 경력 전체를 놓고 보면, 오랜 성공과 극적인 부진이 한 사람의 이야기 안에 모두 담겨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시장이라는 것이 얼마나 예측하기 어려운 대상인지를 말해준다. 15년의 기록도, 그 이후의 부진도, 결국 같은 한 사람이 같은 원칙을 밀어붙인 결과였다는 점이 이 이야기를 오래 곱씹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