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6살 때 할아버지 가게에서 코카콜라 6병짜리 묶음을 25센트에 사서 한 병씩 5센트에 팔았다. 20% 수익률. 아직 초등학교도 다 다니지 않은 아이였다. 그리고 90살이 넘은 지금, 그 코카콜라 회사의 주식을 40억 달러어치 들고 앉아 매년 8천억 원이 넘는 배당금을 받고 있다. 워렌 버핏의 이야기는 단순한 ‘부자가 된 이야기’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돈이 스스로 굴러가게 만드는지를 평생에 걸쳐 증명해 보인 한 인간의 기록이다.
대공황의 아이, 숫자에 빠지다 (1930년)
1930년 8월 30일. 미국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 워렌 에드워드 버핏이 태어난 해는 역사상 최악의 경제 위기인 대공황이 한창 진행 중이던 시절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역사상 가장 성공한 투자자가 될 인물이 시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세상에 나왔다.
아버지 하워드 버핏은 주식 브로커였다. 어린 워렌은 아버지 사무실에 놀러 가서 칠판에 주가를 적어주는 일을 하곤 했다. 숫자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며 무언가를 느꼈을 그 꼬마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될지 이미 어렴풋이 정해진 것 같았다. 그는 숫자를 사랑했다. 친구들이 밖에서 뛰어놀 때 버핏은 혼자서 긴 숫자들을 암산으로 더하며 놀았다고 한다.
꼬마 사업가의 탄생 — 껌, 콜라, 핀볼 기계까지
7살 무렵, 버핏은 오마하 공공도서관에서 한 책을 빌렸다. 제목은 《1,000달러를 버는 1,000가지 방법》. 그 책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어린 버핏은 책을 읽으며 눈이 번쩍 뜨였다. 돈을 버는 방법이 이렇게나 많다니. 그는 곧장 실전에 돌입했다.
버핏의 첫 번째 사업은 껌 판매였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껌을 팔았다. 이어서 코카콜라를 팔고, 잡지를 팔고, 신문 배달을 했다. 그러다가 10대 초반, 동네 골프장을 돌아다니며 잃어버린 골프공을 주워 모아 되파는 사업도 했다. 어른들이 보면 그냥 ‘부지런한 아이’쯤으로 보였겠지만, 버핏의 머릿속은 달랐다. 그는 매 사업마다 원가, 판매가, 수익률을 꼼꼼히 계산했다.
하이라이트는 핀볼 기계 사업이었다. 1945년, 버핏은 친구와 함께 25달러짜리 중고 핀볼 기계를 하나 사서 동네 이발소에 가져다 놓았다. 이발소를 기다리는 손님들이 25센트씩 넣으며 게임을 했고, 수익이 쌓이자 오마하 전역에 기계를 늘려나갔다. 결국 핀볼 사업을 1,200달러에 팔았다. 15살 소년이 말이다. 그리고 그 돈으로 40에이커짜리 농지를 샀다. 농지를 농부에게 임대해 임대료를 받는, 정석 같은 자산 투자였다.
버핏은 13살에 첫 세금 신고서를 제출했다. 신문 배달로 번 소득을 신고하면서 자전거를 업무용 비용으로 처리했다. 세금까지 계산하는 13살이라니. 그의 고등학교 졸업앨범 사진 아래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수학을 좋아함; 미래의 주식 중개인.”
생애 첫 주식 투자 — 그리고 인생 첫 교훈
1941년, 버핏은 11살이었다. 그는 누나 도리스와 함께 Cities Service Preferred라는 주식을 주당 38달러에 3주 샀다. 총 114달러, 그동안 모은 돈의 상당 부분이었다.
그런데 주가가 27달러로 곤두박질쳤다. 누나는 매일같이 워렌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고 한다. 버핏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주가가 40달러로 올라오자 팔았다. 주당 2달러 이익. 기분 좋게 팔았다. 그런데 그 이후가 문제였다. Cities Service 주가는 202달러까지 치솟았다.
버핏은 이 경험에서 세 가지 교훈을 얻었다고 나중에 직접 밝혔다. 첫째, 내가 얼마에 샀는지에 집착하지 말 것. 둘째, 작은 이익에 서둘러 팔지 말 것. 셋째, 남의 돈을 맡아 투자할 때는 확신이 있을 때만 할 것. 11살짜리 아이가 주식 한 번 잘못 팔고 얻은 교훈치고는, 나중에 수백조 원을 운용하게 될 원칙들이었다.
하버드에서 거절당하고, 운명의 스승을 만나다
고등학교를 마친 버핏은 대학에 가기 싫었다. 이미 장사로 돈을 잘 버는데 왜 학교에 가냐는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결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스쿨에 입학했지만, 2년 만에 네브래스카 대학으로 옮겨 경영학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인생에서 가장 큰 불운처럼 보였던 이 거절이, 사실은 가장 큰 행운이었다. 버핏은 그 무렵 벤저민 그레이엄이라는 사람이 쓴 책 《현명한 투자자》를 읽었다. 번개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고 그는 표현했다. 그레이엄이 컬럼비아 대학에서 강의한다는 것을 알게 된 버핏은 즉시 컬럼비아 대학원에 지원했다. 그리고 합격했다.
벤저민 그레이엄은 ‘가치 투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의 철학은 단순했다. 주식은 숫자가 아니라 기업의 일부 소유권이다. 그 기업의 진짜 가치(내재가치)보다 훨씬 싸게 팔릴 때 사면 된다.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서 주가는 반드시 진짜 가치를 따라간다. 이것이 ‘안전 마진(margin of safety)’의 개념이다. 버핏은 이 개념에 완전히 매료됐다. 그레이엄 수업에서 버핏이 받은 성적은 A+. 그레이엄이 수십 년 강의 역사상 유일하게 A+를 준 학생이었다.
“무료로라도 일하겠습니다” — 스승 밑에서의 수업
컬럼비아 대학원을 마친 버핏은 월스트리트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그레이엄 스승 모두 말렸다. 버핏은 그레이엄에게 편지를 보냈다. “무보수로 일하겠습니다.” 그레이엄은 거절했다. 몇 번을 더 시도하다가 결국 1954년, 그레이엄-뉴먼 코퍼레이션에 연봉 1만 2천 달러짜리 직장을 얻었다.
이 시절 버핏이 배운 투자 방식은 나중에 그가 ‘시가 담배꽁초 투자’라고 부른 것이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버려진 것 같은 싸구려 주식을 사서 남은 마지막 한 모금을 뽑아내는 방식이다. 실제로 돈은 벌었지만, 이 방식에는 한계가 있었다. 한 번 한 모금 빨고 나면 그 기업과의 관계는 끝이었다. 장기 복리 효과를 내기 어려웠다. 버핏은 이 교훈을 훗날 체득하게 된다.
1956년, 그레이엄이 은퇴하며 파트너십을 해산했다. 버핏은 오마하로 돌아왔다. 수중에는 17만 4천 달러(현재 가치로 약 20억 원 이상)가 있었다. 그리고 25살의 버핏은 자기 집 방 한 칸에서 새 역사를 시작했다.
버핏 파트너십 시대 — 방 한 칸에서 시작한 헤지펀드
1956년 버핏 파트너십(Buffett Partnership Ltd.)이 출범했다. 초기 투자자는 친척과 지인들로 구성된 7명, 총 10만 5천 달러였다. 버핏 자신은 100달러를 넣었다. 사무실도 없이 집에서 시작했다. 파트너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버핏은 목표를 명확히 밝혔다. “다우존스 지수를 연평균 10%포인트 이상 앞지르는 것.”
결과는 어땠을까. 1957년부터 1969년까지 12년간, 버핏 파트너십의 연평균 수익률은 29.5%였다. 같은 기간 다우존스 지수의 평균 수익률은 7.4%였다. 단 한 해도 손실을 낸 적이 없었다. 파트너십은 급성장해 1960년에는 8개 파트너십을 운용하게 됐다. 1962년에는 모든 파트너십을 하나로 통합했고, 운용 자산은 720만 달러에 달했다.
이 시절 버핏에게 운명적인 만남이 하나 있었다. 1959년 여름, 오마하 클럽에서의 점심 자리에서 찰리 멍거를 소개받았다. 변호사이자 투자자인 멍거는 버핏과 달리 “싼 쓰레기를 사는 게 아니라, 훌륭한 기업을 적정한 가격에 사라”고 강조했다. 그레이엄의 양적 분석에 기업의 질적 가치를 더하라는 것이었다. 버핏은 이 관점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투자 철학이 서서히, 그러나 결정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버크셔 해서웨이 — 최악의 거래가 최고의 제국으로
버핏의 가장 유명한 투자 실수는,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제국을 탄생시킨 투자였다.
1960년대 초, 버핏은 버크셔 해서웨이라는 섬유 회사 주식이 엄청나게 싸다는 것을 발견했다. 전형적인 시가 담배꽁초 투자였다. 주당 7달러 60센트에 사기 시작했는데, 회사의 순 운전자본은 주당 19달러였다. 계산상 공짜로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버핏은 공격적으로 주식을 매집했고, 1965년에 경영권을 장악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섬유 산업 자체가 망해가고 있었다. 미국 내 섬유 공장은 경쟁력이 없었다. 버핏은 돈을 계속 쏟아부었지만 수익이 나지 않았다. 결국 1985년 마지막 섬유 공장을 팔았다. 버핏은 나중에 “버크셔를 산 것은 내 인생 최악의 거래였다”고 고백했다. 만약 그 돈을 처음부터 보험 사업에 투자했더라면 훨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버핏은 버크셔를 버리는 대신 껍데기를 활용하기로 했다. 섬유 사업에서 나오는 현금을 다른 사업에 투자하는 지주회사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대형 투자가 보험이었다. 보험 사업의 매력은 ‘플로트(float)’였다. 고객이 보험료를 내면 그 돈은 보험 사고가 날 때까지 버핏이 자유롭게 굴릴 수 있는 무이자 투자 자금이 된다. 버핏은 이 구조를 사랑했다. 2025년 1분기 기준 버크셔의 보험 플로트는 1,730억 달러에 달한다.
철학의 진화 — 담배꽁초에서 명품 브랜드로
1969년, 버핏은 충격적인 선택을 했다. 파트너십을 해산하기로 한 것이다. 그 시절 주식 시장은 거품이 잔뜩 끼어 있었다. 버핏은 파트너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는 지금 시장 환경에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임을 해서 좋은 기록을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시장이 달아오를 때 빠져나온 것이다. 이 결정은 훗날 1973~74년 시장 폭락 때 얼마나 현명했는지 증명됐다.
찰리 멍거의 영향이 깊어지면서 버핏의 투자 철학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그전까지는 벤저민 그레이엄처럼 “이상하리만치 싼 주식”을 찾아다녔다면, 이제는 “훌륭한 기업을 합리적인 가격에” 사는 전략으로 전환했다. 핵심은 ‘경제적 해자(economic moat)’였다. 경쟁자들이 쉽게 넘볼 수 없는 강력한 진입 장벽을 가진 기업. 강력한 브랜드, 독점적 시장 지위, 소비자들의 반복 구매 습관. 이런 기업은 비싸 보여도 10년, 20년 후에는 결코 비싼 게 아니었다.
이 철학의 첫 번째 결실은 시즈 캔디였다. 1972년, 버크셔는 시즈 캔디를 2,500만 달러에 인수했다. 멍거는 사야 한다고 했고, 버핏은 처음에 비싸다며 망설였다. 그러나 시즈 캔디에는 뭔가 달랐다. 매년 가격을 올려도 고객들이 계속 샀다. 브랜드 충성도가 아주 강했다. 버크셔는 이후 수십 년간 시즈 캔디에서 20억 달러 이상의 이익을 뽑아냈다. 이 경험이 버핏의 투자 철학을 완전히 바꿨다.
코카콜라 — 52년 마신 뒤에 산 주식
버핏의 투자 중 가장 전설적인 것을 하나 꼽으라면 코카콜라다. 그는 어릴 때부터 코카콜라를 팔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52년간 코카콜라를 마셨다. 그러다 1988년, 드디어 주식을 샀다. 1988년부터 1994년까지 총 13억 달러를 투자해 4억 주를 사 모았다.
그 이후 버핏은 단 한 주도 팔지 않았다. 그냥 앉아서 배당금을 받았다. 1994년에는 코카콜라로부터 7,500만 달러의 배당을 받았다. 그 배당금은 매년 올랐다. 2023년에는 연간 7억 달러를 넘었고, 2025년에는 8,160억 원이 넘는 배당을 받았다. 원금 대비 배당수익률은 연 65%가 넘는다. 그냥 통장에 돈이 쌓이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버핏이 왜 코카콜라에 열광했는지는 그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전 세계 하루 19억 잔. 제품은 70센트짜리인데 브랜드는 수조 달러짜리다. 이런 기업은 내일 당장 핵전쟁이 나도 살아남는다.”
버핏의 투자 성향 — 한 줄로 정리하면
수십 년의 버핏 투자를 관통하는 원칙들은 놀랍도록 일관적이다.
우선 그는 자신이 이해하는 사업에만 투자한다. 이른바 ‘능력 범위(circle of competence)’. 인터넷 버블이 한창이던 1990년대 말, 버핏은 기술주를 사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구식이라고 비웃었다. 그런데 2000년 닷컴 버블이 터지자 버크셔만 멀쩡히 살아남았다. “나는 복잡한 것은 잘 모른다. 그래서 복잡한 것은 사지 않는다.”
그는 또한 시장의 공포를 기회로 본다. 그의 유명한 말이 있다. “남들이 탐욕스러울 때 두려워하고, 남들이 두려워할 때 탐욕스러워라.” 2008년 금융위기 때 버핏은 골드만삭스에 50억 달러를 투자했다. 모두가 패닉에 빠져 팔 때 샀다. 그리고 막대한 수익을 거뒀다.
그는 단기 매매를 경멸한다. “이상적인 보유 기간은 영원이다.” 그리고 “10년을 보유할 자신이 없다면 10분도 보유하지 마라.” 버핏에게 주식 매매는 스포츠 경기가 아니다. 좋은 기업에 동업자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복리의 마법을 절대적으로 믿는다. 그는 어릴 때 눈덩이를 굴리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자신의 전기 제목도 《스노볼》이다. 작은 눈덩이를 충분히 긴 언덕 위에서 굴리면, 결국 거대한 눈덩이가 된다. 충분한 수익률로 충분히 오랜 시간 복리로 굴리면, 그것이 전부다.
애플 — 테크를 멀리하던 사람이 테크 최대 주주가 되다
수십 년간 기술주를 멀리하던 버핏에게 2016년 큰 변화가 생겼다. 애플 주식을 사기 시작한 것이다. 버핏은 애플을 기술 기업으로 보지 않았다. 소비재 기업으로 봤다. “사람들은 아이폰을 두 번째 차를 파는 한이 있어도 바꾸지 않는다.” 코카콜라처럼 강력한 브랜드 충성도와 반복 소비 습관. 그것이 버핏이 애플에서 본 것이었다.
버크셔는 애플에 총 400억 달러를 투자했고, 한때 포트폴리오의 절반에 가까운 비중까지 늘었다. 2025년 기준 버크셔는 여전히 애플의 최대 기관 주주 중 하나다. 버핏은 애플에 대해 “코카콜라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보다도 더 훌륭한 사업”이라고 말했다.
숫자가 말하는 버핏의 인생
버핏의 자산 성장 곡선에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 하나 있다. 그의 현재 자산(약 1,490억 달러)의 99% 이상이 56살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30대 초에 이미 백만장자였다. 그러나 억만장자가 된 것은 1986년, 56살이었다. 복리의 힘은 시간이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이것이 버핏이 10대부터 투자를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버크셔 해서웨이의 1965년부터의 연평균 복리 수익률은 약 19.8%. 같은 기간 S&P 500은 약 10.2%였다. 숫자로 보면 별 차이 없어 보이지만, 60년이 쌓이면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1965년에 버크셔에 투자한 1달러는 지금 수만 달러가 됐다.
돈을 번 사람, 그리고 돈을 나누는 사람
버핏은 오마하에서 1958년에 산 집에 여전히 살고 있다. 샀을 때 가격은 3만 1,500달러였다. 지금 그 집 가격은 동네 주택 시세 그대로다. 세계 10대 부자가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사 먹으며, 코카콜라를 하루에 몇 캔씩 마시며 사는 것으로 유명하다. 가장 좋아하는 점심은 5달러짜리 맥도날드 세트다. 재산이 많을 때는 메뉴를 업그레이드하고, 시장이 안 좋은 날은 절약한다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2006년, 버핏은 자신의 재산 99%를 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주로 빌 앤 멀린다 게이츠 재단을 통해서. 이것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개인 기부 선언이었다. 2010년에는 빌 게이츠, 멀린다 게이츠와 함께 ‘기부 서약(Giving Pledge)’을 만들었다. 억만장자들이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겠다고 서약하는 운동이다. 버핏이 지금까지 기부한 금액은 580억 달러가 넘는다.
은퇴, 그리고 남겨진 유산
2025년, 95살의 워렌 버핏은 버크셔 해서웨이 CEO 자리에서 물러났다. 후계자는 그레그 에이블. 버핏은 회장직은 유지했다. 그의 은퇴 소식에 버크셔 주가가 7% 이상 급락했다. 시장이 그를 얼마나 아끼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의 유산은 돈이 아니다. 물론 돈도 엄청나지만. 진짜 유산은 그가 수십 년간 주주들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매년 버크셔 연례 보고서에 쓴 버핏의 편지는 투자의 교과서로 전 세계 투자자들이 탐독한다. 그리고 매년 오마하에서 열리는 버크셔 주주총회. ‘자본주의의 우드스탁’이라 불리는 이 행사에 전 세계에서 수만 명이 몰려와 버핏과 멍거의 말을 들으려 했다.
6살 때 코카콜라 한 병 5센트에 팔던 꼬마가, 95살에 그 코카콜라 회사로부터 매년 8,000억 원의 배당금을 받으며 은퇴했다. 그 사이에 흐른 시간이 버핏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복리, 인내, 그리고 시간. 버핏이 평생 가르쳐 준 것은 결국 이 세 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