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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러소, 고통을 견디는 역량에 투자하다

2026-10-13

토머스 러소는 워런 버핏이나 피터 린치만큼 대중에게 익숙한 이름은 아니다. 하지만 가드너러소앤가드너라는 운용사를 통해 네슬레, 하이네켄, 유니레버 같은 소비재 기업들을 수십 년 단위로 보유해온 그의 방식은, 월가의 빠른 회전율 문화와는 완전히 다른 결의 투자 철학을 보여준다.

그가 남긴 표현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고통을 견디는 역량(capacity to suffer)”이다. 이는 투자자 본인의 인내심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가 투자하는 기업 경영진의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단기 이익을 포기할 줄 아는 경영진

러소가 주목한 것은 분기 실적을 조금 희생하더라도 브랜드와 유통망에 장기적으로 돈을 쏟아붓는 경영진이었다. 광고비를 늘리거나 신흥시장에 수년간 적자를 감수하며 진출하는 결정은, 당장의 주가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월가의 애널리스트들은 이런 결정을 종종 비효율로 해석했다. 하지만 러소는 반대로 생각했다. 오히려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경영진이야말로 가족 경영 구조나 창업자의 지분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 분기별 실적 압박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기업이라고 보았다.

그가 소비재 기업, 특히 유럽 기반의 식음료 브랜드들에 집중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네슬레나 하이네켄 같은 기업들은 창업 가문이나 재단이 지배 지분을 쥐고 있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경영진이 단기 실적보다 브랜드의 수십 년 뒤를 보고 투자할 수 있는 구조적 여건을 만들어주었다.

소비재 브랜드를 고른 이유

소비재, 그중에서도 식음료 브랜드는 러소에게 특별한 매력을 가진 자산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브랜드는 한번 소비자의 습관 속에 자리잡으면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 진입장벽이 높다 — 경쟁자가 같은 브랜드 인지도를 쌓는 데 오랜 시간과 비용이 든다
  • 현금흐름이 꾸준하다 — 식음료 소비는 경기와 무관하게 반복된다
  • 신흥시장 확장 여지가 크다 — 소득 수준이 올라가는 지역에서 브랜드 소비가 늘어난다

이런 특성 때문에 러소는 신흥시장 진출 초기에 적자를 내는 기업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하곤 했다. 당장 손실을 보더라도 브랜드가 그 시장에 먼저 자리잡는 것이, 몇 년 뒤 수익성으로 전환될 때 훨씬 큰 가치를 만든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월가의 속도와 다른 보유 기간

러소의 포트폴리오 회전율은 업계 평균과 비교해 현저히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한 기업을 10년, 20년 단위로 보유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고, 이는 “고통을 견디는 역량”이 단지 경영진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투자자 자신에게도 요구되는 덕목임을 보여준다.

분기 실적이 기대에 못 미치거나, 시장이 브랜드 투자를 비용으로만 해석해 주가가 흔들릴 때, 그 변동성을 버티지 못하면 애초에 길게 보고 산 주식의 의미가 사라진다. 러소에게 인내는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경영진의 장기적 판단을 신뢰하고 그 신뢰를 지켜내는 능동적인 선택이었다.

지배구조가 만드는 시간의 여유

러소가 유독 유럽형 가족 경영 기업에 끌렸던 배경에는, 미국식 상장기업 지배구조와의 비교가 깔려 있다. 분기마다 실적을 발표하고 애널리스트들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구조에서는, 경영진이 몇 년짜리 투자를 결정하기가 훨씬 어렵다.

반면 창업 가문의 지분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기업은, 단기 주가보다 브랜드의 백년대계를 우선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러소는 이런 지배구조 자체를 하나의 경쟁우위로 읽어낸 투자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