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런 버핏이 버크셔 해서웨이를 통해 보험 플로트(float)로 주식을 사 모았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같은 모델을 훨씬 작은 규모로, 훨씬 덜 유명하게 수십 년간 실행해온 사람이 있다. 마클(Markel Corporation)의 투자 책임자였던 톰 게이너의 이야기다.
보험회사가 왜 주식을 사는가
보험회사는 고객에게 보험료를 먼저 받고, 사고가 나면 나중에 보험금을 지급한다. 그 사이에 생기는 돈, 즉 받았지만 아직 내주지 않은 돈을 플로트라고 부른다. 플로트는 보험사 입장에서는 부채지만, 당장 현금으로 쥐고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보험사는 이 돈을 채권 위주로 보수적으로 굴린다. 보험금 지급 요청이 언제 들어올지 모르니 변동성이 큰 자산은 피하는 게 전통적인 방식이다. 마클은 여기서 달랐다. 게이너가 투자를 맡으면서, 플로트의 상당 부분을 주식에 투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톰 게이너라는 사람
게이너는 월스트리트의 스타 펀드매니저 출신이 아니었다. 회계와 재무를 공부한 뒤 보험업계에서 경력을 쌓았고, 마클이라는 중소형 전문보험사(specialty insurer)에 합류해 오랜 기간 투자 부문을 이끌었다. 화려한 언론 노출보다는 꾸준함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반복해서 강조한 원칙은 단순하다. 좋은 비즈니스를, 합리적인 가격에, 유능하고 정직한 경영진이 있는 곳에, 장기로 투자한다는 것이다. 버핏과 멍거의 철학과 거의 겹친다. 실제로 게이너는 공개 석상에서 버핏과 멍거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밝혀왔다.
보험업과 주식투자를 함께 묶은 이유
보험업 자체도 결국 위험을 가격에 반영해 인수하는 일이다. 어떤 리스크를 어떤 가격에 받아들일지 판단하는 감각은, 어떤 기업을 어떤 가격에 살지 판단하는 감각과 본질적으로 닮아 있다. 게이너는 이 둘을 같은 사고방식으로 다뤘다.
마클의 보험 인수 부문이 꾸준히 흑자를 내면, 플로트는 비용 없이 쓸 수 있는 자금에 가까워진다. 그 돈을 장기간 묻어둘 수 있는 좋은 기업의 주식에 투자하면, 보험 이익과 투자 이익이 함께 쌓이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흔히 “마클 스타일”이라고 불리는 운용 모델의 핵심이다.
단기 성과보다 복리에 집중한 태도
게이너의 운용은 화려한 베팅과는 거리가 멀었다. 회전율이 낮았고, 한번 편입한 기업은 오래 보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분기 실적이나 시장의 단기 소음에 흔들리지 않고, 수년에서 수십 년 단위로 기업의 가치가 쌓이는 과정을 기다리는 방식이었다.
이런 접근은 당연히 지루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보험업 자체가 긴 호흡의 사업이다. 보험금 청구가 수년 뒤에 발생할 수도 있는 업종에서, 투자 역시 같은 호흡으로 운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작지만 꾸준했던 실험의 의미
마클은 버크셔 해서웨이만큼 거대한 기업은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마클과 게이너의 사례를 흥미롭게 만든다. 거대한 자본력이나 압도적인 협상력 없이도, 보험업의 구조적 특성과 원칙에 충실한 주식 선택을 결합하면 장기적인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이다.
게이너는 종종 자신의 모델을 “버크셔를 본떠 만든 작은 복제품”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해왔다. 하지만 수십 년에 걸쳐 같은 원칙을 흔들림 없이 지켜냈다는 사실 자체가, 그 모델이 결코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