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에 태어나 101세까지 산 사람, 그리고 같은 펀드를 1928년부터 1983년까지 운용한 사람. 필립 캐럿의 이력을 숫자로만 적어도 이미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그가 남긴 건 화려한 수익률 신화가 아니라, 시장이 몇 번이고 무너지는 걸 직접 겪으면서도 자리를 지킨 사람의 태도였다.
파이오니어 펀드의 시작
캐럿은 하버드를 나와 MIT에서 화학을 공부하다가 투자로 방향을 틀었다. 1928년, 그는 ‘파이오니어 펀드’의 전신이 되는 펀드를 만들었다. 공교롭게도 그 시점은 대공황 직전이었다.
이듬해인 1929년 대공황이 터졌을 때 수많은 펀드와 투자자들이 사라졌지만, 캐럿의 펀드는 살아남았다. 이 경험은 그에게 평생 따라다닌 질문을 남겼다. 왜 어떤 펀드는 살아남고 어떤 펀드는 사라지는가. 그의 답은 화려한 전략이 아니라 과도한 레버리지를 쓰지 않는 것, 그리고 패닉 속에서도 팔지 않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55년을 운용한다는 것
캐럿이 같은 펀드를 55년 동안 운용했다는 사실 자체가 투자 업계에서는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대공황, 2차 세계대전, 여러 번의 경기침체와 강세장을 모두 통과했다.
그가 특별히 뛰어난 예측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단기적인 시장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대신 그는 좋은 기업을 찾아 오래 보유하는 쪽을 택했고, 그 ‘오래’라는 시간의 단위가 몇 달이나 몇 년이 아니라 수십 년이었다는 점이 그를 구분 짓는 지점이다.
워런 버핏이 언급한 투자자
캐럿은 생전에 워런 버핏과도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버핏이 그를 존경할 만한 투자자로 언급한 적이 있다는 사실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된다. 다만 둘 사이의 구체적인 대화 내용이나 버핏이 캐럿에게서 직접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는 공개된 자료만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분명한 건 두 사람이 공유하는 투자 철학의 결이 있다는 점이다. 기업을 ‘주식 코드’가 아니라 사업체로 보고, 시장의 소음보다 기업의 본질적인 가치에 집중하며, 보유 기간을 인위적으로 짧게 가져가지 않는다는 태도다.
그가 남긴 원칙들
캐럿은 투자에 관한 글과 책을 여러 권 남겼는데, 그 내용을 관통하는 태도는 대체로 이런 것들이었다.
- 예측보다 관찰: 시장의 다음 움직임을 맞추려 하기보다, 지금 눈앞의 기업이 어떤 상태인지를 보는 데 집중했다.
- 분산과 인내: 소수 종목에 집중하기보다 여러 산업에 걸쳐 분산하면서도, 한번 담은 종목은 쉽게 팔지 않았다.
- 레버리지 경계: 대공황을 겪은 세대답게 빚을 내서 투자 규모를 키우는 방식을 신중하게 다뤘다.
- 긴 호흡: 한 분기, 한 해의 성과보다 10년, 20년 단위의 결과를 중요하게 여겼다.
이 원칙들은 지금 보면 평범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이 원칙을 55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것도 수많은 폭락장을 통과하면서 실제로 지켰다는 사실이 이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든다. 말로 하는 원칙과 몇십 년을 버텨낸 원칙은 무게가 다르다.
오래 산다는 것, 오래 투자한다는 것
캐럿은 100세가 넘도록 장수했고, 말년까지도 투자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삶을 돌아보면 투자에서의 ‘장기’라는 단어가 얼마나 다른 스케일로 쓰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대부분의 투자자에게 55년은 상상하기 어려운 시간이다. 하지만 그 극단적인 사례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지금 내가 하는 투자 판단이, 1년이 아니라 10년 뒤에도 같은 논리로 설명될 수 있는 판단인가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