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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막스, 사이클을 읽는 남자

2026-09-17

1990년대 초, 월가에서 부실채권(distressed debt)이라는 영역은 여전히 변두리 취급을 받고 있었다. 파산 직전이거나 이미 파산한 기업의 채권을 사들인다는 발상 자체가, 당시 주류 투자자들 눈에는 위험을 자초하는 일처럼 보였다. 하워드 막스는 바로 그 변두리에서 오크트리캐피털을 만들었고, 그곳에서 자신만의 투자 철학을 구체화해 나갔다.

막스의 이력은 사실 화려한 출발과는 거리가 있었다. 와튼스쿨을 졸업하고 씨티은행에서 채권 리서치를 담당하던 시절, 그는 회사채와 하이일드 채권처럼 당시로서는 인기 없는 자산군을 들여다보는 역할을 맡았다.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곳을 오래 들여다본 경험은 훗날 그가 오크트리를 세우고 부실채권과 하이일드 시장에 집중하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화려한 성장주나 유행하는 테마가 아니라, 시장이 가격을 잘못 매긴 구석을 찾아내는 일이 그의 본업이 된 셈이다.

부실채권이라는 역발상

부실채권 투자의 핵심은 단순히 싼 것을 사는 게 아니다. 막스가 강조해온 지점은, 어떤 자산이 부실하다는 낙인이 찍히는 순간 그 자산의 실제 가치와 시장가격 사이에 괴리가 생긴다는 사실이었다. 파산 절차에 들어간 기업의 채권을 아무도 만지려 하지 않을 때, 그 회사의 사업 자체가 완전히 망가진 것인지 아니면 단지 자본구조가 무너진 것인지를 구분해내는 안목이 필요하다. 오크트리는 이런 상황에서 채권자의 지위로 들어가, 구조조정 과정을 통해 회사의 새로운 주주가 되는 방식으로 여러 차례 수익을 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개별 거래의 구체적인 수익률이나 규모는 공개된 자료로 일일이 확인하기 어렵고, 여기서는 그 방식의 논리에 집중하는 편이 정확하다.

중요한 건 이 접근이 예측이 아니라 대응에 가깝다는 점이다. 막스는 스스로 미래를 맞히는 재주가 없다고 여러 차례 밝혀왔다. 대신 그는 지금 시장이 어떤 국면에 있는지, 투자자들의 심리가 어느 쪽으로 쏠려 있는지를 읽어내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그 관찰을 담아낸 그릇이 바로 그의 메모였다.

메모라는 형식

하워드 막스를 다른 유명 투자자들과 구분 짓는 것은 성과 자체보다 그가 오랫동안 써온 투자자 메모(memo)다. 그는 정기적으로 시장 상황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글을 고객들에게 보냈고, 이 메모들은 시간이 지나며 업계 안팎에서 널리 읽히는 텍스트가 되었다. 워런 버핏이 공개적으로 그의 메모를 기다린다고 언급했다는 일화는 이제 꽤 알려진 이야기다.

메모의 내용은 화려한 예측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전제를 반복해서 깔아두고, 그 위에서 지금 시장 참여자들의 심리가 낙관과 비관 중 어디에 더 쏠려 있는지를 짚어냈다. 시장이 지나치게 낙관적일 때 위험이 쌓이고, 지나치게 비관적일 때 오히려 기회가 생긴다는 그의 시각은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 그 국면을 실시간으로 판단하는 일은 전혀 단순하지 않다.

사이클을 다루는 태도

막스가 반복해서 강조한 개념 중 하나가 바로 사이클(cycle)이다. 그는 경제와 시장이 일정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자처럼 한쪽 극단에서 반대쪽 극단으로 오가며 움직인다고 보았다. 신용이 넘칠 때가 있으면 신용이 메마를 때가 있고,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분위기가 있으면 위험을 극도로 회피하려는 분위기도 따라온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나온 그의 유명한 질문이 있다. “지금 우리는 사이클의 어디쯤에 있는가?” 이 질문에는 답을 정확히 맞히겠다는 야심이 담겨 있지 않다. 대신 지금 자신이 낙관과 비관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 판단을 내리고 있는지, 그리고 그 판단이 다수의 심리와 같은 방향인지 반대 방향인지를 스스로 점검하게 만드는 장치에 가깝다. 부실채권 투자자로서 그가 오랫동안 해온 일도 결국 이것이었다. 다수가 공포에 질려 던지는 자산을 사이클의 저점 부근에서 사들이고, 다수가 환호할 때는 한 걸음 물러서는 것.

오크트리를 거대한 대체투자 운용사로 키워낸 것도, 매달 혹은 분기마다 써 내려간 메모로 업계의 신뢰를 얻은 것도,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을 오래 들여다보고, 지금이 어떤 국면인지를 끊임없이 되묻는 태도 말이다.